▲ 곽성일 편집부국장
▲ 곽성일 편집부국장

정치는 저울과 닮았다. 어느 한쪽 끝에 무게가 과도하게 실리면 저울은 흔들리고 그 흔들림은 결국 양쪽 모두에게 불안으로 되돌아온다. 문제는 어떤 세력이 더 무겁냐가 아니라 왜 모두 끝단에 서서 서로를 끌어내리는 데 힘을 쓰는가이다.

극단으로 치우친 무게는 언제나 균형을 잃게 만들고 그 균형 상실이 깊어질수록 반대편의 복원력도 강해진다. 저울이 기울어질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양쪽이 아니라 중심이다. 중심이 흔들리면 저울은 존재의 의미를 잃는다.

극단의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승패는 갈릴 수 있어도 중심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승자도 패자도 없다. 기울어진 저울 위에선 누구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저울의 복원력을 되찾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무게를 끝단에서 조금씩 중심으로 옮기는 일이다. 끝단에서는 작은 차이가 큰 흔들림이 되지만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균형은 쉬워지고 힘은 덜 들어간다. 양쪽의 무게가 중심을 향해 한 걸음만 옮겨도 저울은 스스로 안정을 되찾는다.

그때 비로소 흔들리던 불안에서 벗어나고 중심을 유지하느라 허비하던 에너지도 줄어든다. 그 에너지는 다시 공존과 협력의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지금 한국 정치가 겪는 가장 큰 문제는 특정 진영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 전체가 끝단에 고착된 것이다.

극단을 선택하는 것이 정치적 효용으로 여겨지는 풍토, 합리적 타협이 오히려 약함으로 규정되는 문화, 상대를 이기기 위해 끝단으로 더 깊이 밀고 가는 경쟁, 이 모든 것이 저울의 중심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정치의 전체적 흔들림은 더 커졌고 복원력은 점점 더 정치 밖의 영역에서 나오고 있다. 역사는 단순하다. 한쪽으로 깊이 기울어진 저울은 반대쪽에서 반드시 되돌아오려는 힘을 만든다. 그 힘은 어느 진영을 향한 보복의 에너지가 아니라 중심을 회복하려는 자연스러운 균형의 법칙이다. 정치는 이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끝단에 머문 세력은 언젠가 중심으로 다시 끌려오게 마련이고 중심을 떠난 정치의 운명은 늘 흔들림이었다.

그러나 정치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일은 정치인에게만 맡겨둘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저울의 복원력은 국민에게 있다.

정치가 어느 방향으로 치우치든 국민은 일정한 시점에서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려는 힘을 발휘한다. 이 힘이 작동할 때 정치의 극단은 멈추고 공존의 가능성이 열린다. 한국 정치가 여러 번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완전한 붕괴를 겪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 국민적 복원력이 끊임없이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정치가 다시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 답은 극단이 아니라 조금씩 중심을 향해 움직이려는 의지에 있다. 양쪽 모두가 한 걸음만 내딛어도 저울은 흔들림을 멈추고 제자리를 찾는다. 중심 위에서만 지속 가능한 미래가 가능하다. 정치는 끝단에서 승부를 내는 게임이 아니다. 저울의 중심을 지키는 일, 그 안정 위에서 공존의 정치를 만드는 일, 그 책임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있다.

지금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정치의 목적이 승리가 아니라면 그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저울의 중심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중간지대나 타협의 미학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가 함께 지속될 수 있는 토대’에 가깝다. 한쪽의 승리 위에 세운 질서는 오래가지 못한다. 반대쪽의 복원력이 언제든지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정치란 결국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누가 중심을 지키느냐의 문제다.

정치가 끝단의 함정에서 벗어나 중심의 책임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국가는 진보하고 사회는 성숙한다. 국민의 복원력은 이미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정치가 그 흐름을 읽지 못한다면 역사는 또다시 균형을 향해 움직일 것이다. 그때의 복원력은 정치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훨씬 더 넓다.

결국 정치가 할 일은 저울을 무너뜨리지 않는 일이다. 그 단순한 원칙을 잊은 순간 정치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의미도 잃는다. 균형은 선택이 아니라 지속을 위한 조건이다. 이 조건을 회복하는 일이 지금 한국 정치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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