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욱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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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3년 9개월.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원하면 영토를 내놓으라”는 ‘종전안’이 제시됐다. 한때 세계 3위 핵보유국이었지만 ‘부다페스트 각서’에 서명하며 무장을 내려놓은 나라가 맞닥뜨린 현실이다. ‘핵을 포기하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던 국제사회의 약속은 휴지 조각이 됐다.

평화안에는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는 말할 것도 없이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등 돈바스 전역을 사실상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고, 동부의 일부 요새 지역까지 내어주라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유엔 체제가 세운 ‘무력에 의한 영토 획득 금지’ 원칙이 이미 수 차례 흔들렸지만, 이번 평화안에서 더욱 명확한 현실로 드러난다. 강대국의 힘 앞에 국제 규범이란 것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가슴 서늘한 장면이다.

28개 조항의 평화안을 제시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나토 5조에 준하는 안전 보장”을 제공하겠다는 조항을 넣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을 영구히 포기해야 하고 정규군 병력도 절반 가까이 줄여야 한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더구나 ‘러시아 본토 공격 시 안전보장 박탈’이라는 단서까지 달았다. 가해자에게는 넓은 땅을, 피해자에게는 선택의 여지 없는 냉혹한 조건을 제시했다.

강대국 간 타협으로 약소국이 희생되는 장면을 인류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유럽 강대국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약소국을 흥정의 대상으로 올려놓던 모습, 20세기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수많은 지역이 지도 위 선 몇 개로 운명이 갈린 악몽이 또다시 재현되고 있다.

이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분단 70년을 지난 대한민국 역시 휴전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언제든 냉혹한 국제 정치의 계산대에 위에 오를 수 있다. ‘힘에 의해 경계가 바뀔 수 있다’는 메시지는 먼 유라시아의 일이 아니라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자 매서운 경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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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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