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이’ 이야기는 태기를 바라며 치성하던 한 집에 스님이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주를 청하는 승려에게 안주인이 쌀을 내주자 승려가 오이 세 개를 건넨다. 오이를 다 먹으면 아들 셋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안주인은 오이를 먹는다. 오이 두 개를 먹었을 즈음 남편이 돌아온다. 이후 아내는 남편과 남은 오이를 나누어 먹는다. 안주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낳는다. 그런데 마지막 오이를 나누어 먹은 탓인지 막내아들은 형들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이후 사냥꾼이었던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비극이 일어난다.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인 호랑이를 찾고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반쪽이도 형들을 따라나서겠다고 한다. 형들은 나무나 바위에 묶어 버리는 등으로 반쪽이가 그들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반쪽이는 나무뿌리를 뽑아버리는 식으로 번번이 형들이 놓은 함정을 벗어난다. 그리하여 삼 형제는 함께 호랑이를 찾으러 간다. 호랑이를 잡으러 가는 길에 머문 팥죽 장수 집에서 주인은 형제들에게 호랑이가 여인으로 변신해 그들의 아버지를 잡아 먹었다고 하며 호랑이를 잡을 방법을 알려준다. 팥죽 장수의 말을 따라 삼 형제는 호랑이를 잡고 아버지의 유골을 찾는다. 그 사이 어머니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반쪽이가 하루 만에 집에 도착하는 신묘한 힘을 발휘해 어머니를 구해낸다. 그런 다음 어머니를 구하던 중 얻은 호랑이 가죽을 집 밖에 널어 둔다. 호랑이 가죽을 탐낸 아랫집 부자가 반쪽이에게 그가 내기에서 지면 딸을 줄 테니 반쪽이가 지면 호랑이 가죽을 자신에게 달라는 제안을 한다. 기지를 발휘한 반쪽이가 내기에서 이기게 되고 이후 반쪽이는 부자의 딸을 아내로 맞게 된다.
오이를 반만 먹은 어머니로 인해 반쪽이는 형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 반쪽의 오이는 상식적으로 온전한 오이보다 뭔가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반쪽밖에 먹지 않았음에도 생에 이르렀다는 것은 어쩌면 반쪽이가 형들보다 더 많은 것을 채워 나온 것이 된다. 온전한 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반쪽이가 먼저 배워 나온 게 되는 것이다. 반쪽이를 형들은 온전치 못한 사람 취급하여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러 가는 길에도 반쪽이를 데려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반쪽이는 제 능력을 발휘하여 시련을 넘어선다. 이야기는 그런 반쪽이를 영웅으로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반쪽이는 아버지를 죽인 호랑이도 벌하고 위험에 처한 어머니도 구하며 배우자까지 얻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부르디외는 사회문화적 환경을 개인이 받아들여 만드는 아우라를 아비투스라 하였다. 그에 기반하여 넘어서기 힘든 계층의 구별이 생기고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기도 한다고 부르디외는 말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벽을 말한 부르디외에게도 아비투스는 그의 말처럼 ‘돌에 새겨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태생적으로 주어졌던 오이 반쪽의 부족함이 영원한 결핍이 되지 않도록 한 것을 반쪽이가 몸소 보여준 것이 되지 않을까.
이야기에서는 반쪽이를 괴롭히는 형들을 나쁜 캐릭터로 그려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온쪽이도 반쪽이도 나름의 최선을 다하여 마주하고 있는 생이다. 오늘 하루를 마주하는 이들의 모든 노력은 무엇 하나 헛된 것이 없기 때문이고 뭔가를 이루어낸 것은 그만큼의 노력을 다한 게 되기 때문이다. 허니 온쪽이니 반쪽이니 하며 구분하기 전에 먼저 보아줄 수 있어야 한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양분하고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를 구분하고 위아래를 나누기 전에 있는 그대로의 가능성을 발견해 주어야 한다. 다름이 다양함이 되고 다양함이 생산적 변화를 만들어내어 다른 것이 빈손은 채워가야 할 것이 많은 것으로, 채워진 손은 나눌 것이 많은 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하루하루를 나름의 노력으로 채워가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