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늄이라 쓰고, 페라고늄(Pelargonium)이라고 읽는다. 이름이 달라지면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이는 것처럼, 꽃도 나도 언어 속에서 다른 빛을 띤다. 그러나 향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불리는 방식이 달라도, 햇살 아래 피어나는 생의 결은 같다. 제라늄이라 부르든, 페라고늄이라 부르든. 결국 흩어진 향과 빛 속에서 자신을 지켜 나간다.
엄마는 제라늄을 좋아하셨다. 장미나 국화를 키우면 좋을 텐데 왜 하필 제라늄일까 의아해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곱고 정연해야 하기에. 그래서 꽃이란 고요하거나 화려해야 한다고 믿었다. 제라늄은 국화의 고요도 없고, 장미의 화려함도 없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고집스럽게 자기 빛을 내뿜는다. 늘 그 빛이 불편했다. 엄마는 그런 제라늄을 ‘불꽃’이라고 부르며 미소 짓곤 했다. 햇살을 머금은 붉은 꽃잎을 바라보면, 어린 날 창가에 앉아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바람에 흔들리던 초록 잎사귀는 엄마의 손길처럼 따뜻했다. 눈길을 끌지 않아도, 그 작은 잎과 향기 속에 묵묵한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차라리 화려하지 않기에 오래 바라보게 되고, 조용하기에 더 깊이 머물게 되는 꽃이었다.
제라늄은 쓴 향을 지녔다. 그것은 마치 풀숲을 헤친 듯하다. 장미의 달콤함과 허브의 서늘함 사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에 머무는 냄새다. 오래된 서랍 같다. 그 특유의 냄새는 겉으로 눈길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면을 지키기 위한 방패다. 속으로 울어내는 향으로 세상을 견뎌내는 것이다. 그 냄새는 어린 시절 부엌을 떠올리게 한다. 약탕기에서 피어오르던 쓴 약 냄새와 함께, 그 앞에 앉아있던 엄마의 굽은 등이 겹친다. 남들은 제라늄에서 밝고 화사한 빛을 본다지만, 내게 제라늄은 늘 고단한 삶을 감내하던 엄마의 그림자와 함께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그 쓴 향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사랑과 따스함을 배운다.
며칠 전, 길을 걷다 문뜩 발길이 멈췄다. 투박한 돌확에 담긴 제라늄이 눈길을 당겼기 때문이다.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는 꽃송이,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는 마치 손짓으로 나를 부르는 듯했다. 그때 마침 주인이 나와서 말을 걸었다.
“한 포기, 드릴까요?”
주인은 커다란 봉지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흰 제라늄은 보기 힘들어요.”
주인의 목소리에 묘한 자부심이 섞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대편 구석에서 눈부신 흰빛이 번져왔다. 꽃잎 하나하나가 부드러운 눈송이처럼 쌓여 있는 듯한 제라늄이었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꽃들은 사뿐히 춤을 추고, 공기 속에 은은한 향을 흩뿌렸다. 주인의 자랑이 아니더라도, 그 풍성함은 스스로 뽐내듯 존재하고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제라늄을 한 아름 안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지인에게 몇 포기 나눠주었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제라늄은 홀로 빛나는 꽃이다. 다른 꽃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스스로 자리를 지킨다. 아름다움이란 반드시 타인과 어울려야 빛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고요한 힘 속에서도 존재한다. 봄에도 피우고, 여름의 열기에도 꺾이지 않고, 가을과 겨울에도 잎은 질기게 푸르렀다. 그것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꺼지지 않았다. 엄마는 그 생명력을 사랑했다. 삶은 찬란하지만 않았고 견디고 버티는 것이었다. 제라늄은 그 진실을 보여주었다.
엄마는 잎을 따서 서랍에 넣어두곤 하셨다. 옷에 스며든 향은 늘 새로웠고, 마치 햇볕에 마른 바람처럼 깨끗했다. 서랍을 열 때마다 번지는 잔향은 단순한 향기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흔적이었다. 어릴 적에는 그 향이 왜 옷마다 스며 있는지 몰랐다. 다만 서랍을 열면 밀려오던 은근한 기운 속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가족을 위해 반복되던 손길, 바람에 말린 빨래의 따뜻한 촉감, 그리고 잎을 따서 넣어두던 마음까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임을 알게 되었다. 제라늄 향은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지금도 오래된 옷장 속에서 조용히 엄마를 불러낸다.
집에 와서 제라늄을 심었다. 흙 속에 뿌리내리는 모습을 보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섬세함을 느꼈다. 잎사귀 하나, 꽃잎 하나하나 속삭이듯 내 마음에 다가왔다. 작은 화분 속 세계가 하루를 비추고 있다. 붉게 핀 꽃송이마다 엄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주름진 손으로 흙을 다지던 모습, 꽃을 바라보며 낮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의 손길이 내 곁을 스친다. 그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동시에 단단한 생의 힘을 품고 다가왔다.
그랬다. 그것은 엄마의 간절한 기도였다. 살아 있다는 증거를 세상에 남기려는. 제라늄은 물을 아껴야 오래 산다. 너무 많은 물은 뿌리를 썩게 한다. 사랑도, 기억도 마찬가지다. 너무 붙잡으면 상하고, 적당한 거리를 둘 때 오히려 오래 머문다. 화분에 물을 주며 엄마의 시간을 떠올린다. 그리움은 시들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꿔 내 안에서 다른 꽃으로 피어날 뿐이다.
다시 제라늄을 바라본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름이 달라져도 본질은 변하지 않듯 엄마의 마음도 언제나 한결같았다. 힘든 날들도 많았지만, 가족을 지켜내려는 노력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꽃잎은 떨어져도 향은 오래 남듯, 엄마의 시간도 내 안에서 오래 숨 쉬고 있다. 조용히 물 한 컵을 건넨다.
△약력
2002년 《아동문학평론》 동화등단, 2006년 《수필시대》 수필등단
동화집 『할머니가 남긴 선물』(2024),『그리지 못한 그림』(2025)
현) 《영남문학》 편집인, 《대구문학》 편집국장, 도서출판 진서 대표
△수상소감
오래된 골목길을 걷습니다. 엄마는 지난한 삶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며 살아오셨습니다. 유일한 멘토이셨지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거창한 언어보다 침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엄마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 많은 언어를 하나하나 되짚어가고 있습니다.
글의 끝은 어디일까요. 누군가는 ‘상을 받는 일’이라 말하고, 또 누군가는 ‘한 권의 책’이라 말합니다. 저에게 글을 쓴다는 일은 처음도 지금도 여전히 두렵습니다. 글이란 결국 누군가에게 응원받고 싶고, 또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담기는 것이니까요. 제 글이 그저 허공에 흩어지는 먼지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까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글이라는 친구와 함께 살아가겠지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풀어내는 동안 마음속 깊은 곳의 온기를 다시 느꼈습니다. 수필은 결국, 자기 자신과 나누는 진솔한 대화이니까요. 한 편의 수필은 저를 다듬어 주고, 잠시 머물게 해주었습니다. 이번 수상은 제 삶의 조각들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늘에서도 제 마음이 닿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치열하게 글을 써나가며, 이 감사함과 송구함을 조금씩 갚아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곁에서 응원해 주는 가족과 문우님들께도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