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산책길을 걷다 우연히 한 그루의 나무 앞에 멈춰 섰다. 두 개의 가지가 잘려 나간 자리에서 흰색 수지가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오래 참아온 눈물이 껍질을 뚫고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 앞에서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날따라 수지의 눈물자국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빗방울이 수지와 섞이며 흘러내릴 때마다, 나무는 말없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지가 잘려 나간 흔적은 검게 움푹 패어 있었고, 그 중심에서 하얀 눈물이 굳으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끼나 전지가위가 나무의 몸에 닿았을 때 몸을 얼마나 움츠렸을까. 다가오지 말라고 얼마나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을까. 나무의 온 신경과 세포가 곤두서서 저항도 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힘 앞에, 스르르 무너지는 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운명이리라. 나무도 외부 자극에 정밀하게 반응한다. 잘린 부위는 곧장 화학적 신호를 보내고, 수분 손실과 세균 침입을 막기 위해 수지를 흘려보낸다. 자신의 상처를 싸매는 과정이다. 잘려 나간 팔, 다리를 깁고 덧대는 처절한 구조 작업이다. 어떤 나무는 상처가 깊으면 수지를 며칠, 혹은 몇 주에 걸쳐 계속 흘려보낸다고 한다. 그것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나무가 살아내는 방법이다. 생명을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일 것이다.
나무는 상처받은 마음을 아무도 모르게 수습한다. 팔, 다리 하나씩을 떠나보내고 소리 없는 울음을 운다. 터져 나오는 눈물이 시간이 지나면서 흔적을 남긴다. 어떤 흔적은 단단한 보호막이 되어 자신을 지키지만, 어떤 흔적은 오래도록 가슴 저미는 흉터로 남는다. 죽음을 이기는 연습 같다.
나무의 수지는 눈에 보이는 마음의 언어다. 나무도 사람처럼 눈물로 외형적인 아픔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눈물은 시간이 지나면 단단히 굳어서 다시금 본래의 몸이 된다. 사람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때, 저항의 언어로도 표현하지만, 침묵으로, 눈물로 대변하기도 한다. 그 눈물은 쉽게 보이지 않지만, 마음 안쪽에서 천천히 스며 나와 언젠가는 굳은살이 된다.
사람이 상처를 입었을 때 피가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 딱지가 앉아 새살이 돋듯이, 나무도 그렇게 상처를 치유해 간다. 수지는 나무의 보호막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오기까지, 나무는 얼마나 큰 고통을 감내할까. 수지는 단순한 상처의 결과가 아니라, 상처를 딛고 서는 생명의 선언이다. 나무는 잘려 나간 가지를 붙잡지 않는다. 대신 흘러내린 눈물로 상처를 덮고, 그 위에 또 다른 생명의 시간을 쌓는 수업을 한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수지가 굳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오래된 상처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어릴 적, 너무 쉽게 잘려 나간 관계들, 어른이 되어 속앓이하며 흘려보내야만 했던 감정들, 그때마다 나는 상처 위에 무엇을 발랐던가. ‘잊음’이라는 덧칠이었을까, 아니면 ‘무관심’이라는 가림막이었을까. 나무처럼 치유의 수지를 흘려보낸 적이 있었을까.
나무는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가지가 잘려 나간 자리도, 수지가 흘러 굳은 자리도, 모두 껍질 속에 품고 묵묵히 세풍을 맞는다. 봄이 오면 그 옆에서 새싹이 돋고, 여름이 오면 다시 잎을 키워낸다.
나무에게 상처는 생의 일부다. 마치 우리에게 슬픔이 삶의 한 조각이듯, 상처가 있다고 해서 나무가 자라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슬픔을 품은 채, 더 단단해진다. 그 단단함은 결코 완벽한 치유의 결과가 아니다. 상처는 늘 흔적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 흔적 위로 시간과 계절이 지나며 새로운 삶이 자란다.
우리는 종종 상처를 지우려 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덮어버리고, 다시는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나무는 지우지 않는다. 나무는 드러낸다. 드러냄 속에서 치유가 이루어진다.
수지는 나무의 눈물이다. 그러나 그 눈물은 연약함의 상징이 아니라, 생명의 끈질김이다.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직면할 때, 그 자리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
나무 앞을 떠나기 전, 손끝으로 수지가 굳은 자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차가운 표면 아래, 나무의 뜨거운 시간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 마음의 상처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피하고 싶은 흔적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자라온 시간의 무늬로.
누군가가 말없이 내 앞에 선다면, 나도 나무처럼 수지의 눈물을 보여줄 수 있을까.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눈물 자국이 나를 대신해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나무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무는 언제나 말하고 있다. 껍질로, 수지로, 흉터로, 계절로.
그 침묵의 언어를 읽을 수 있다면, 조금 더 성숙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 내 마음의 상처에도 투명한 수지가 흘러내려 단단히 굳어질 것이다.
△약력
제11회 산림문화 작품 공모전 시, 수필부문 대상(국무총리상)
제7회 중봉 조헌문학상 우수상
△수상소감
수필을 써 본 지 꽤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가끔 시의 유혹에 빠져 허우적거리긴 했지만, 저의 깜냥은 수필이었나 봅니다.
글 쓰는 일은 느린 작업이라서 따분한 삶에 숨을 쉬게 하는 여유가 생깁니다
어느 날 문득, 공모전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십 년 넘게 놓고 있던 손을 다시 놀려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부랴부랴 마감 하루 전에 메일을 보내고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선線을 넘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내 안의 ‘나’와 또 다른 자아가 ‘나’를 만들어 보려 하나 봅니다.
선選해 주신 심사위원님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