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계·용봉리 어르신 삶과 상처 기록한 17편 수록…지역 첫 산불 치유문학 결실
80여 도서관 배포·낭독회 연계…“공동체 회복의 기록, 또 다른 치유로 이어지길”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또 다시 일으켜 세우는 순간이 있다.
“그래도… 소를 두고 갈 수는 없었지요.”
불길이 마을을 삼키던 그날 밤, 등 뒤까지 번져오던 화염보다 더 뜨거웠던 것은 삶을 버티게 했던 단 하나의 존재를 향한 이 한 문장이었다.
그 절박함과 애틋함이 시간이 흘러 시(詩)가 되었고, 이젠 한 권의 인생 시집으로 묶여 경북 곳곳의 공공도서관으로 퍼져나간다.
읽는 이의 가슴에 오래 남아, 상처 난 마음을 천천히 어루만질 치유의 기록으로.
의성군(군수 김주수)은 산불 피해 주민들의 구술 인생 시를 묶은 시집 ‘소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를 출간하고, 도내 약 80여 개 공공도서관에 배포할 예정이라고 25일 밝혔다.
올해 초 대형 산불을 겪은 단촌면 구계2리와 신평면 용봉리 주민들의 이야기가 문학의 형식으로 기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시집은 의성군 문학상주작가지원사업과 산불피해 치유문학 프로그램이 만나 탄생한 기록물이다.
사윤수·김수상 작가는 지난여름부터 겨울까지, 어르신들의 집 마루에 앉아 같은 찻잔을 나누어 마시며,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시간들을 천천히, 조심스레 꺼냈다.
처음에는 “내 이야기를 누가 듣겠노”라며 고개를 젓던 어르신들이, 한 차례 두 차례 계절이 바뀌는 동안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잿빛 기억 속에서도 꺼내기 힘들었던 고백들이 조용한 구술로 쏟아졌고, 언젠가 말해야만 했던 인생의 순간들이 시가 되었다.
사윤수 작가는 “시집을 손에 쥐신 어르신들이 ‘이런 영광이 다시 없을 것’이라며 울먹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며 “산불이 남긴 마음의 상처가 기록의 과정을 지나며 조금씩 아물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이었다”고 말했다.
구계2리 강영자(86) 어르신의 ‘손글씨 피해 목록’은 작가들에게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었다.
자녀들에게 남기려 모아둔 들깨, 찹쌀, 고추장…
바람이 스치면 곧바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재더미만 남았지만, 어르신은 불에 탄 물건들을 한 자 한 자 달력 앞뒤 가득 적어 내려갔다.
그 글씨는 잃어버린 물건의 목록을 넘어서, 한 사람이 살아온 세월 그 자체였다.
김수상 작가는 “글을 쓰지 못하던 어르신들이 구술 시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기록을 갖게 된 순간 보여준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며 “마치 오래 기다려온 자신만의 족보를 얻은 듯한 표정이었다”고 회상했다.
총 17편으로 구성된 이번 시집은 △불길 속에서 남겨진 결정의 순간 △재로 변한 터전과 함께 무너졌던 마음 △그리고 다시 살아내기 위해 처음 내디딘 작은 걸음까지 그 모든 과정을 빼곡히 담아냈다.
단순한 경험담을 넘어, 지역 공동체가 아픔을 기록하고 회복을 나누기 위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인문 기록이다.
의성군은 시집을 각 도서관에서 북큐레이터 프로그램, 주민 북토크, 지역 기록 프로젝트 등과 연계해 활용할 수 있도록 안내 문구를 동봉해 배포할 계획이다.
군 관계자는 “이 시집이 단순히 비치되는 책이 아니라, 산불의 기억을 지역사회가 함께 이야기하고 치유하는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시집 참여 어르신들은 오는 12월 20일 ‘인생 시 낭독’ 무대에 오른다.
마이크 앞에 서면 허리가 굽은 노인도, 거동이 불편한 분도 그날만큼은 누구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이 겪은 밤을 다시 꺼내 보인다.
말문이 막히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순간이 이어지겠지만, 그 낭독은 슬픔의 재현이 아니라 ‘우리는 이겨냈다’는 선언이 될 전망이다.
김주수 의성군수는 “이번 시집은 재난 이후 공동체가 서로를 붙들며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라며 “주민들이 서로의 시를 통해 용기를 얻고, 또 다른 치유가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불길은 많은 것을 태웠지만, 주민들의 기억까지는 태우지 못했다.
그 기억이 시가 되어 남았고, 이제 그 시가 누군가의 손에 닿을 때 또 다른 회복이 조용히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