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불 가는 일은 갓 시집온 새댁 몫이었다. 낯설고 힘들었다. 다 탄 연탄이 들러붙어 속을 썩였다. 부엌칼로 떼려다 재가 깨지면 아수라장이 됐다. 가스를 마시지 않으려 숨을 참고 참다 눈물을 쏟았다. 새벽에도 벌떡 일어나 연탄을 갈아야 했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방에서 편히 드라마 보는 동안 연탄 아궁이 앞에 앉아 얼마나 많이 꺽꺽거렸는지 모른다.”
수필가 박은희 씨는 ‘내 기억 속의 연탄’에서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처럼 기억을 풀어 놓는다. ‘방을 따뜻하게 데워 주어야 할 연탄은 내 마음을 싸늘하게 식히는 무기 같은 존재였다.’ “방 따뜻하니?” 처녀 때 친정아버지가 새벽에 연탄을 갈면서 다정하게 물으셨다. 그때마다 자는 체하며 대답 않은 게 두고두고 한이 된다.
30~40년 전에는 연탄을 광에 가득 쌓는 것으로 겨우살이 준비가 시작됐다. 언덕바지를 힘겹게 오르는 연탄 손수레. 지나가던 행인들이 달려들어 밀어준다. 검정이 얼굴에 묻어도 씩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겨울채비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연탄 보기가 힘들다. 1970년대만 해도 전체 가구의 70%가 연탄을 사용했다. 800만 가구가 넘었다. 하지만 올해는 5만9000여 호. 따라서 연탄 공장도 줄줄이 문을 닫았다. 현재 전국에 17곳뿐이다. 중장년층에게는 구공탄, 연탄이 지워질 수 없는 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중략) 내 몸을 다 태워서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다.”(안도현 시 ‘연탄 한 장’) 그래서 버려진 연탄재를 발로 차면 안 된다. 남을 위해 자신을 내 준 희생이기 때문이다.
“연탄으로 데워진 방에 아버지를 모셔놓고 ‘방 따뜻하세요?’라고 말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박은희 씨 내레이션은 그렇게 가슴 아리게 끝난다. 따뜻한 사랑이 그리운 ‘연탄의 계절’이다. 하지만 지금은 잊혀진 계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