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현국 시인·시와반시 주간
▲ 강현국 시인·시와반시 주간

“에세이를 쓰는 것은 꽁지를 까딱거리는 새의 발밑에 다정하게 밑줄을 그어 주는 일 같다. 에세이를 쓰다가 백지 위에 찍힌 글자들을 보면 새의 발자국을 닮았다.” 변희수 시인의 <마음의 용도>에 실린 글 일부이다. 새의 발밑에 다정하게 밑줄을 긋듯 새의 발자국을 닮은 그의 글 몇 곳에, 아래와 같이 참견하고 싶었다. … ‘조금 더 걷고 싶으면 이쪽 길도 있어요!’ 꽁지를 까딱거리는 새를 향해 손짓하고 싶었다.

“본명은 이미 본래적이다. 아무런 제스처를 취하지 않아도 벌써 최종적인 무엇에 닿아 있는 느낌이 있다. 대신 필명은 늘 개척해 가야 할 미지의 무엇처럼 느껴진다. 필명은 본명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본명의 확고부동한 것을 거부한다. 필명을 가진 자는 씨 뿌리고 싹 틔우고 열매를 거두는 것까지 모든 노고를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짐이 있다.”

본명은 존재의 근원이고, 필명은 존재의 과업이다. 이미 완성형으로 주어지는 본명에는 ‘운명’의 낌새가 있다. 미지로의 초대인 필명은 도착하지 않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의 문장이다. 본명과 필명 사이, 태어남과 만들어감 사이의 역동적 긴장이 삶의 문법이다.

“우아하다는 것은 안이 바깥으로 스며 나온 것이다. 우아라는 아우라, 그것은 세계의 고유함이 바깥으로 확장될 때 드러난다. 우아함에는 특별한 자장과 같은 에너지가 있다. 우아함을 기류로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

우아함은 자기존중이 만들어내는 에너지이자 존재의 품위이다. 그것은 마음의 질서와 몸의 질서가 남남이 아닐 때 우러나는 은은한 향기이다. 우아는 자신과 세계의 경계를 부드럽게 허문다. 우아함이란 결국 존재가 세계와 맺는 가장 고요한 화해의 방식이 아닐까.

“곡물이라는 말에는 물질이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 곡식이라는 간곡한 이미지는 사라지고 생산성이라는 민감한 과제만 우선적인 것처럼 들린다. 피땀 어린 노동의 대가가 재화의 지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곡물이라는 말에는 욕망이라는 씨앗이 도사리고 있다.”

-‘곡물’이란 수량과 단가로 번역되는 시장의 언어이고, ‘곡식’이란 땀과 체온을 간직한 감사의 언어이다. 본질가치인 곡식이 교환가치인 곡물로 자세를 바꿀 때 삶의 품위는 훼손된다.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이다. 언어의 변화는 감각의 이탈을 동반한다.

“예쁘고 날렵한 스푼과 나이프와 포크에 취해서 구닥다리 취급하는 동안 엄마도 아빠도 사라졌다. 살아 있는 동안 수저만큼 곁에 두고 열심히 애용하는 물건이 또 있을까.”

새로움의 빛은 오래된 것의 그림자를 삼켜버린다. 수저는 가장 인간적인 사물이다. 그것은 식구들의 생을 이어주는 체온 같은 것이어서 낡을수록 정겹다. 그리움을 간직한 밥상 위의 서사가 수저의 손 떼이다.

“‘산다’라는 말은 선명한 말이다. 그런데 이 확연한 말 앞에 ‘잘’이란 수식어가 붙게 되면 멈칫거리게 된다. 잘 산다는 것 그것의 기준이 모호하며 개인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잘’이라는 한 음절이 창문을 여는 순간, 삶은 방향을 잃고 비틀거린다. ‘어떻게?’라는 질문이 바람처럼 고개를 들고 달려들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잘’은 누군가의 ‘잘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잘 산다는 말은 언제나 미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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