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초·재선 의원 개혁모임 주도
19대 국회부터 계파 정치에 매몰
작년 당권 경쟁서 권력 대변 앞장
22대 총선 공천받아 대부분 승선
4·10 총선 험지출마 3040 후보
'첫목회' 결성…쇄신 여부에 관심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집권 여당 국민의힘에서 당권파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비주류 소장파의 존재와 성공 여부가 주목받고 있다. 4·10 총선에서 보수 험지에 출마했던 30~40대 후보들을 중심으로 당의 전면적 쇄신을 요구하면서 과거 국힘 전신 보수당에서 개혁을 주장했던 인사들의 성공과 실패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올랐다.
국민의힘 한 전직 의원은 19일 “자기 정치적 손익을 따지지 않고 당에 쓴소리도 할 수 있는 초·재선 의원이 근래 없어 당의 독주와 민심 외면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민의힘 당대표를 뽑는 3·8 전당대회 당시 전 초선 의원 48명이 김기현 의원을 당선시키기 위해 경쟁자였던 나경원 전 의원의 불출마를 촉구하는 연판장을 돌리는 비극(?)을 연출했다. 이어 김기현 대표 사퇴를 요구한 서병수·하태경 의원 등 비윤계 중진 공격수 역할을 한 일도 있었다. 친윤(친윤석열)계의 ‘홍위병’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은 대부분이 22대 총선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옳은 소리를 하던 김웅 의원(서울 지역구)은 공천에 앞서 스스로 불출마하거나 이준석과 ‘천하용인’은 축출당했다.
총선 3연패 한 22대 총선을 계기로 국민의힘에선 쇄신 여론이 일고 있다. 김재섭 당선자(서울 도봉갑)를 비롯해 낙선한 이재영(서울 강동을)·박상수(인천 서갑) 후보와 박은식(광주 동·남을) 비대위원 등 9명의 3040 후보들은 ‘첫목회’를 결성했다.
첫목회는 지난 2일 첫 모임에서 현행 당원투표 100%로 돼 있는 전당대회 당대표 선출 규정을 당원투표 50%, 국민 여론조사 50%로 바꾸고 단일지도체제를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14일에는 보수 재건을 주제로 14시간 동안 밤샘 토론 후 브리핑에서 ‘연판장 사태’의 분열 정치, ‘입틀막’의 불통 정치 등을 총선 참패 원인으로 꼽은 뒤 “우리는 침묵했다. 우리의 비겁함을 통렬히 반성한다”고 밝혔다.
정당정치에서 정풍(整風)의 진원은 늘 초·재선 의원이었다. 정풍운동의 파고에 따라 당내 인적 쇄신이 단행되거나 권력지형이 바뀌었다. 정풍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세력 중 상당수는 당의 주류로 올라섰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의원들은 공천에서 탈락하거나 정부 요직에서 배제됐다.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 3선 개헌에 반대하고 탈당한 김영삼, 현석호씨 등은 한국 정당사상 소장 개혁파 원조다. 박정희 공화당 시절 3선 개헌을 반대, 집권 공화당에서 뛰쳐나온 예춘호 전 사무총장, 양순직, 박종태 의원은 70년대 재야로 나중에 유신 야당 신민당으로 이적했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공화당 정풍 운동은 유명하다. 신민당의 내분과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12월 24일 박찬종·오유방 등 소장파 17명이 국민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급기야 10.26 사태를 겪게된데 대한 책임 통감,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당을 떠나고 공직에서 퇴진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당시 공화당 총재인 JP에 전달했다. 이듬해 80년 3월 정풍운동 멤버 8인은 당직 사퇴서를 첨부해 “공화당이 야당이 될 각오를 촉구”하는 제3차 결의를 했다. 지탄 인사로 지목된 이후락 의원과 임호 의원이 제명되고, 박찬종, 오유방 의원을 출당 조치하는 한편, 당 지도부와 타협했던 나머지 6명은 경고조치로 회유했다.
1997년 신한국당 초선인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의원은 ‘시월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김영삼 정부 노동법 날치기 처리에 반대하며 여권 지도부 인책을 요구하는 등 당 쇄신을 압박했다.
87체제 이후 가장 강력한 야당인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시절 김영춘, 안영근, 이우재, 이부영, 김부겸 국회의원 등 ‘독수리 5형제’ 개혁소장파 의원은 중도좌파 성향을 띄었다. 95년 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가 정계 은퇴를 번복, 민주당을 분당한 새정치국민회의로 일부는 가고 남은 통합민주당(조순 이기택)이 97년 11월 대선 정국에서 신한국당과 합당되면서 한나라당이 됐다. 당내 개혁에 한계를 절감하자 탈당, 신당 운동을 하다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친노파와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이후 초선 원희룡, 정병국 의원이 재선의 남경필 의원과 손을 잡고 당내 개혁 목소리를 냈다. ‘남·원·정’으로 불렸다. 2003년에 제기된 ‘60대 용퇴론’은, 17대 총선에서 최병렬 대표를 비롯한 현역 60명을 물갈이하는 계기가 됐다.
18대 국회에서도 김영우·정태근·김성식·황영철 의원 등이 중심이 된 등 한나라당 개혁 성향 의원 12명이 ‘민본21’ 모임을 했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여당 내 야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2008년 19대 국회 들어 친이·친박(친박근혜) 갈등이 폭발하면서 당권파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의원이 눈에 띄게 줄었다. 18대 총선 때는 친박계가, 19대 때는 친이계가 공천 학살을 당하면서 비주류 없는 주류 계파 정치가 들어섰다. '이박' 내분으로 수십년 주류였던 보수정당은 한국 정당 주류에서 비주류가 됐다. 야당이 된 20대 국회도 마찬가지다.
김보리 정치평론가는 “개혁을 추진하려면 명분만으로는 안 되고 일정한 세력 있는 인물의 지원 등 동력이 필요하다”며 “초선 의원들은 독자적인 세를 형성하기가 쉽지 않아 계파 편승 유혹에 빠지기 쉽지만, 당 주류, 권력자 눈치를 보는 해바라기 정치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