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청송객주문학대전
1
내가 머무는 세계로 어스름이 진군해 오고 있다. 검은 군대가 몰려오기 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카멜레온 블루 매니큐어가 마르길 기다린다. 창밖엔 다음 큐를 기다리는 군악 연주자들의 날랜 눈빛처럼 마주 보이는 집마다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있다.
곧 사람들은, 악몽이나 죽음처럼 혹은 낱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리에 끼어 먼 곳으로 날아가는 철새의 날개처럼 아득하고 끄무레한 밤을 맞이해야 한다. 형체도 없는 밤,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밝은 날의 환하던 빛에 안겨 있을 때는 미처 상상하지 못하는, 아득한 밤.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려 한 문장을 썼다. 이어서 한 문장을 더 썼다. 모니터에 쓴 기억을 큰소리로 읽는다.
“그날, 샤워를 마치고 얼굴과 목에 나이트 크림을 문지르다 아오의 문자를 받았다. 이츠키가 도쿄로 돌아가고 반년 만이었다.”
방금 내가 쓴 문장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며 기억의 연결고리를 물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였는지, 어떤 진실도 거짓도 자신하지 못하면서 계속 써 내려간다.
아오의 문자를 받고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를 뚫으며 차를 몰았다. 나는 허겁지겁 아오의 현관문을 연달아 두드렸다. 양철 지붕에 듣는 위협적인 빗소리에 섞여 집안에서 쿨렁대는 소리가 현관문 틈새로 가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몇 번 더 문을 두들기다가 조급한 마음에 손잡이를 돌려본 뒤에야 문이 잠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쿵쾅거리며 복도와 거실을 지나 부엌 사이를 가르는 접이문을 밀치자, 안에서 라벤더 냄새가 몰아쳤다. 식탁 위에서 반쯤 타들어 가고 있는 향초였다.
벽을 더듬어 문가의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켜지고 어둠이 창밖으로 물러나자 아오가 식탁 의자 다리에 기대앉아 흐느끼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곧바로 그를 껴안아 주지 못했다. 핸드백을 내던지고 물이 쏟아지는 수도꼭지부터 돌렸다. 종이 타월을 풀어 바닥에 쏟아진 사케를 닦아낸 다음 굴러다니는 빈 병들을 한곳에 모았다.
그는 취해 있었다. 아오는 오래전부터 마시기 시작한 것 같았다. 어쩌면 내게 제발 한 번만 꼭 와 주길 바란다는 문자를 보내기 전부터, 아니 향초에 불을 붙이기 이전부터. 아오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면도하지 않은 수염이 반년 전 모습과 무척 다르게 보였다. 나는 커튼이 열려 있는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비바람에 검은 망토처럼 펄럭이는 뒤뜰의 나무를 쳐다보며 몸을 떨었다. 적막한 허공에 번득이는 괴이한 빗줄기, 왜 내 마음이 두려운지? 순간 머릿속으로 한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주 먼 곳으로부터 가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 아오의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나는 당황했다. 아오와 나는 많은 것이 달랐다. 국적이 다른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오는 민족이나 혈연, 은행 잔고 같은 소유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반면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그렇듯 상처받기 쉬운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예민한 감성을 보호하려고 언제나 긴장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언제부터 나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놓아버렸다. 과연 인간이라는 게 이해 받을 수 있는 존재이기나 할는지.
그날 밤 아오와 내가 ‘승리의 대포 소리’란 야외 군악대 콘서트, 아니 호주 옛 병사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아오를 쳐다보았다.
“아오!”
“….”
“만약에, 아오가 나를 떠나면 그땐 죽여 버리겠어.”
느닷없는 협박에 아오가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오는 내가 콘서트 내내 산만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아오가 자신의 조국이 패배한 역사가 깃든 곳에서 숙연해 하든 말든 나는 차이코프스키 ‘1812 서곡’의 격렬한 선율에 맞춰 마냥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흔들었다. 대포가 불을 뿜을 때를 놓치지 않고 맹렬히 사진도 찍었다. 내가 이전 남자와 마주칠 것에 대비하느라 초조함을 감추려고 산만하다는 걸 아오가 알 리 없었다. 다행히 이전 남자와 직면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카멜레온 블루 매니큐어를 전등 가까이 대고 비춰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 밤 콘서트 아니, 장례식에서 돌아오면서 내가 나도 모르게 잘못 말한 게 아니었을까? 죽여 버리겠다는 내 말에 놀란 아오가 한동안 침묵하다 여러 번 맹세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정지 신호와 그리고 달리는 트램을 바라보며 나는 운전대를 쥔 속에 힘을 주고 아오의 말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나란히 침대에 누운 내가 차를 타고 오면서 했던 말을 새롭게 설명하려고 했다.
“대포가 폭음을 울리며 불을 뿜는 순간, 피터의 분골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순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맹렬한 두려움이 내 마음을 흔들었어. 전쟁의 신 포브스의 악령 같은 것이 내 안을 저격했다고 할까.”
그 말을 하면서 나는 그 공포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 알 수 없었다. 콘서트는 이전 남자의 할아버지 피터의 유골을 바다로 날려 보내는 이벤트였다. 열네 살에 뉴기니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피터는 자신의 영혼이 죽은 뒤 남태평양 바다를 건너 뉴기니로 가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곳에서 전사한 형을 만날 것이라 했다. 나는 노병이 자신의 목격담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걸 여러 번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좀체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오를 껴안았다. 그새 나뭇가지는 조용해져 있었고 비도 그친 것 같았다. 아오의 입에서 와사비 조린 것 같은 고약한 냄새가 훅 끼쳤다. 잠시 후 내 품에서 빠져나간 아오가 눈물과 콧물을 훔치며 혀가 말린 소리로 불렀다.
“순이!”
“….”
“이츠키… 이츠키가 실종이래.”
나는 아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아오의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주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 도쿄 경찰이 보낸 이메일을 받았어, 이츠키가 실종, 아니 자살일 수도.”
슬픔에 잠긴 아오의 목소리가 바람에 드러눕는 갈대의 서걱거림처럼 들렸다. 금세 내 마음이 아려왔다. 불에 덴 것처럼 심장이 화끈거렸다.
“이츠키가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은 너를 잊지 못했던 모양이야. 그런데 너는 왜 조금도 이츠키의 그런 마음을 걱정하지 않아? 이츠키가 뛰어내릴 만큼 괴로웠는데 너는 연락 한번 하지 않고 네 아픔만 챙기며 살았잖아. 그런 너를 이해할 수 없어. 순이, 어떡하지? 이제 어쩌면 좋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아오가 휴대폰을 열어 이메일을 보여주었다. 하얀 바탕에 까만 로고가 박힌 나이키 운동화 사진은, 함께 해변을 걸었을 때 신발 끈을 묶어 목에 걸곤 했던 이츠키 것이 맞았다.
아오의 북받치는 울음은 쉽게 멎지 않았다. 잠시 흐릿하고 작은 실루엣이 내 앞을 희미하게 스쳐 갔다. 연약한 목숨의 마지막 숨결 같은 여리고 보드라운 여운이 내 안에서 흘러나왔다. 아무 대꾸도 없이 멍해 있는 내 어깨를 아오가 흔들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순이. 무슨 말이라도 해봐. 둘이 서로 사랑했잖아! 왜 아무런 말이 없는 거야? 제발 말 좀 해 봐!”
아오가 울음을 그친 뒤 담배를 꺼냈다. 두 사람 사이에 휴전 같은 정적이 흘렀다. 나는 일어서서 퀼로트 스커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아오는 친구처럼 자란 형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았다. 이츠키와 나는 결코 절대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은커녕 서로 끌리지도 않았다. 만약에 그가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해도 우리가 다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츠키가 스스로 뛰어내렸다면 그건 나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죽은 그의 아내 때문도. 세상 모든 사람이 절대로, 확실히, 분명히,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나만은 이츠키가 아내 또는 나 때문에 그런 게 아니란 걸 장담할 수 있었다.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았다지만, 왜 아오는 형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까. 친구처럼 자란 두 사람은 일부 정서를 빼면 기질이 서로 달랐다. 이츠키는 술이 들어가면 쉽게 울고, 상대방에게 마음을 털어놓지만 아오는 냉담하고 단호하며 어려운 상황을 쉽게 피하는 능력이 있었다.
2
아오와 한집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츠키가 찾아왔다. 아오가 형을 호주로 불러드렸다. 이츠키는 우리와 살면서 자연스럽게 내 차지가 되었다. 오전에만 글을 쓰는 나와 달리 아오는 영어 수업이 끝나고 대학 도서관에 남아서 공부했다. 피곤함에 절어 돌아오는 아오를 내가 껴안아 주는 것을 이츠키는 아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츠키에게는 걸려오는 전화도 그가 전화를 거는 일도 없었다. 자포자기에 빠진 길고 여윈 얼굴과 한집에서 마주하던 나는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오후가 되길 기다렸다가 가까운 해변으로 가서 수영하거나, 하얀 나이키 운동화를 목에 건 이츠키와 함께 늑골 무늬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었다. 한번은 이츠키와 손을 잡고 절벽을 타다 추락해 이츠키에게 업혀 돌아온 일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펍에 들어가서 맥주를 마셨다.
그 여름의 수요일 오후, 해변에 닿았을 때 발치께에 수많은 죽은 새가 떠밀려 와 있었다. 눈을 가까이하자 모두 새끼들이었다. 전쟁터에 핀 검은 꽃처럼 모래사장을 덮고 있는 흑기러기들을 바라보며 이츠키가 말했다.
“저 새들이 태양과 계절을 따라 이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저토록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걸 알았을까?”
나는 한동안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인간보다 청각이 발달한 새들이 천둥번개에 기절한다곤 들었지만 저렇게 떼죽음하는 줄 몰랐네.” 내가 말했다.
그는 내 말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이츠키의 눈을 마주 보며 애써 다르게 말했다.
“스스로 생명을 지킬 힘이 부족한 어린 새들이 죽어서 더 슬프다.”
“더욱 슬픈 건 인간이 목숨을 건 철새의 이동을 무슨 큰 낭만으로 표현한다는 점이야. 저 죽은 새들이 언젠가 유럽 여행에서 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아기 신발 무더기를 연상케 해. 에이, 그만 가자.” 이츠키가 말했다.
새들이 발바닥에 밟혀서 모래사장을 걸을 수도, 물가에 새들이 둥둥 떠 있어서 수영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펍으로 들어갔다. 맥주를 들이켜던 이츠키가 불현듯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츠키는 짧은 문장과 단순한 단어를 사용하고 문법에 어긋나게 말할 때가 많았지만 정작 영어가 문제 되진 않았다. 의미 전달이 불분명하다 싶을 땐 전화기를 열어서 번역기를 사용했다. 말끝이 분명하지 않다 싶으면 단어마다 확인하듯 끄덕거림을 덧붙이거나 했던 말을 반복했다.
“내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나는 아빠가 될 수 없어. 아직은 준비가 안 되었어. 실직자에 아파트도 없잖아. 하는 내 말에 그녀가 떼를 썼어. 그래서 화가 나서 무조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어.”
이츠키가 그의 아내 얘기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말이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갈수록 이츠키의 목소리가 조금씩 갈라졌다. 백인 가정에 입양되어 성장한 나는 같은 민족 가정에서 성장한 이츠키를 향한 강한 질투심을 느꼈다. 나는 탁자 모서리에 소리 나게 손톱을 문질러댔다. 이츠키가 말을 이어갔다.
“폭설이 내리는 저녁이었어, 폭설이… 폭설이, 하얗게 뒤덮인 비포장도로엔 오로지 우리 둘뿐이었어. 한 노인이 나타나 폭설 위에 누워있는 나를 흔들었어. 내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노인이 소리쳤어. 뒤집어진 차에 사람이 깔려 죽어 있다고. 나도 이미 그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왜 일이 그렇게까지 되었는지 나 자신에게 묻기만 하고서. 아내의 몸속에는 생명이, 사고는 내가 자초한 일인데, 왜 아내가 죽어야 했는지, 그것만 생각했어. 나중에 경찰이 수거해 온 아내의 핸드백에서 아파트 계약서가 나왔을 땐….”
마흔넷 사내라고 믿어지지 않는, 자기연민으로 가득한 이츠키가 동갑내기 여자인 내게 결코, 절대, 분명히 같은 말을 쏟아내며 눈물을 찔끔댔다. 나는 지친 미소를 지으며 인내심을 보였다.
펍 안의 손님들을 의식한 이츠키가 곧 눈물을 그쳤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지는 사이로 내 명치를 훑고 여린 숨소리가 짧게 지나갔다. 그토록 힘없고 처량한 목소리로 뭐라고 부르짖는 것일까. 나는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흰빛을 다투고 있는 먼 바다로 시선을 던졌다. 전쟁 선포를 알리는 나팔처럼 울리는 무역선의 뱃고동 소리에 섞이어 이츠키의 말이 들려왔다.
“당신과 동생은 서로 사랑하지 않아, 상대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도 안 보여.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하잖아. 당신들 둘 다 서로 이해하는 척하지만,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 오로지 서로를 기만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뿐이야. 당신들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고 단지 안 그런 척할 뿐이겠지.”
이츠키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츠키가 모르는 게 있었다. 나는 아오와 만난 첫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3
4월의 어느 날 넙데데하고 각진 턱을 한 아오를 처음 만났다. 그즈음 나는 이른 아침부터 시립도서관에 틀어박혀 전쟁 기록물을 읽거나 메모하는 것이 일과였다. ‘남태평양의 분노’ 두꺼운 책과 ‘전시’ 잡지를 펼쳐놓고 한 줄 문장을 찾아 책장을 넘기며 긴장하다 탁,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 넓은 열람실에서 아오가 나와 마주 보고 자리를 잡은 건. 하긴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감색 캡을 쓴 사내가 카키색 백팩에서 노트북을 꺼내다 내 눈과 마주쳤다. 그 바람에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볼펜을 잡지 위에 떨어뜨렸다.
그는 곧 시선을 내리고 뭔가를 읽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힐끔거리는 나와 달리 그는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도 곧 고개를 숙이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주 앉은 남자를 잊어버리고 한 사진에 시선이 오래 붙들렸다. 연합군 백인 소년의 목에 총부리가 닿아있고 총을 겨누는 일본군의 등…, 삶과 죽음 사이에 흐르는 예리한 공기를 표현할 소설 문장에 대해 한참 고민하다 앞에 앉은 사내가 일본인이라고 혼자 내기를 걸었다.
며칠 후 시립도서관에서 다시 아오를 만났다. 독감에 걸려 마스크를 끼고 있는 내게 그가 눈인사를 했다. 분류 번호 964로 시작되는 파퓨뉴기니 역사책 앞이었다. 앤작데이(Anzac Day)가 며칠 남아 있지 않아 전쟁에 관한 짧은 글을 쓰려는 사람들로 역사서가 주변이 붐볐다. 나는 그곳에서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계단에 앉아서 보온병을 열고 생강차를 따랐다. 난롯불 같은 햇볕을 쬐며 뜨거운 차를 들이켜도 여전히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잠시 뒤 내가 가방을 거두고 일어서는데 그가 십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오고 있었다. 가까이 온 그가 종이컵을 계단에 내려놓고 쪼그리고 앉더니 백팩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가 담뱃불을 붙이면서 국적을 물었다. 그때 오스트레일리안이라고 대답했는지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담뱃불을 종이컵에 문지르는 걸 보다말고 나는 그곳을 떠났다.
아오를 처음 만난 날로부터 두 계절이 지난 이른 봄 그를 초대했다. 직업적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은둔한 채, 초조한 언어로 인간의 내면과 행적을 상상하며 혼자 사는 집안 구석구석엔 고독과 쓸쓸함, 외로움이 가득했다. 묵은 책에서 떨어진 꿉꿉한 곰팡내가 점거한 집에 어쩌자고 아오를 불러들인 것인지.
벤치탑 위에는 표고버섯과 양배추, 청경채와 새우 같은 식재들이 흩어져 있었고 가스 불 위에서는 냄비가 들썩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생선 요리를 선호하는 아오를 위해 야키소바를 만드는 중이었다. 한국 식품점과 대형 마트를 뛰어다니며 각종 식재들을, 소스는 가까스로 온라인에서 구매했다.
나는 채소를 다듬고 아오가 냄비를 지켰다. 그러다 아오가 감색 캡을 벗고 소매를 걷어붙인 뒤 국수를 찬물에 헹구어서 소쿠리에 건졌다. 우리는 작은 주방에서 서로의 몸을 부딪쳐가며 야키소바를 완성했다. 마주 앉아 국숫발을 말아 넣던 남녀의 미소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대화를 하느라 흔들어대는 손바닥이 서로 닿기만 하면 불꽃이 일어날 것 같았다. 레드 와인 한 병이 금세 바닥났다. 나는 몇 번에 걸쳐 망설이다 아껴두었던 오래된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땄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일어섰던 그 죄의식은 뭐였을까? 내가 다시 그날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날처럼 30년 묵은 한정판매 레지스터 와인을 선 듯 꺼내게 될까.
포커를 든 채 아오가 보여 줄 게 있다며 일어섰다. 백팩에서 꺼내온 노트북을 펼치자, 화면 가득 ‘카우라 일본 공원’ 안내판이 나타났다. 휘휘 내젓는 백인의 손이 옆으로 뻗어 거치대에서 소책자를 집어 들더니 같은 손이 화면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어떤 길을 가리켰다. 관리인의 손이라고 아오가 설명했다. 사물들이 계속 바뀌면서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공원의 가장자리, 방향 표시, 일본 도자기, 붉고 노란 단풍나무, 일본풍 정자… 편편한 대리석에 일본어로 새겨진 글씨 ‘마루야마 가이코’에서 화면이 정지된 것처럼 오래 머물렀다.
“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모르고 자랐어. 할아버지의 묘비가 호주에 있다는 건 도쿄를 떠나기 며칠 전에 알았을 뿐이야.”
나는 2차 대전 종전 후 남태평양의 일본 전쟁 포로들을 수용했던 카우라 수용소의 새벽 탈출 역사를 알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며 침묵했다.
“홋카이도에서는 가족 중에 전쟁 포로가 있었다는 사실은 후손들에게 극비였어. 조상이 전쟁포로가 되는 것은 자손만대로 불명예스러운 일이었거든. 도쿄로 이사를 한 뒤에도 비밀은 유지되었던 셈이지.”
아오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는 달리 전쟁, 특히 일본에 관해서 말할 땐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웠다. 나는 일어섰다. 싱크대 서랍을 열자, 콘서트 초대장이 그대로 있었다. 접힌 초대장을 넓게 펼쳤다.
“콘서트 초대장이야.”
아오는 시큰둥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아오에게 2차 대전 당시 일본 잠수함이 호주를 침공해 폭격을 가했던 곳 중 한 장소에서 열리게 될 노병의 장례식을 겸한 야외 콘서트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전 남자의 조부 장례식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아오와 나는 와인 잔을 부딪치며 콘서트에 가기로 했다. 우리의 밤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4
아오가 아이엘츠(IELTS)에 합격하던 날 나는 아오를 힘껏 껴안아 주었다. 일본에서 영어 교사였던 아오는 뒤늦게 호주에서 전쟁역사로 학위를 받을 계획이었다. 나는 아오와 동거가 시작된 뒤 한 줄의 소설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이츠키와 아오, 내가 호주산 가재 요리를 먹다 아오가 카우라 여행을 제안했다. 나는 아오가 이츠키에게 피도 안 섞인 할아버지 묘지를 보여주고 싶어 안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이츠키를 쳐다보았다.
이츠키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오는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들고 돌아왔다. 아오와 나는 정보를 찾고 숙소를 부킹하는 사이사이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며 먹거리를 사다 아이스박스를 채웠다. 이츠키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카우라로 가는 아침이 되었다. 감색 캡을 눌러쓴 아오가 운전대를 잡았다. 이전에 길을 잃었던 쓰라린 경험이 있는 아오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라며 큰소리 쳤다. 그때까지도 이츠키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차에서 물러서서 아오와 내가 짐을 싣는 걸 못 본 척했다. 릴리필리 나무 그늘에 돌아서 있는 이츠키의 검은 머리카락에 얼룩덜룩 빛과 그림자가 엇갈렸다. 나와 동생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외로운 영혼처럼 구는 이츠키를 향해 아오가 큰 소리로 불렀다. 이츠키가 지렁이 같은 그림자를 데리고 다가와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이츠키의 어깨를 살짝 때린 뒤 조화 한 다발을 옆에 내려놓았다.
차가 고속도로에 오르자 시속 110km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동공을 카메라 모드로 전환하고 눈으로 사진을 찍었다. 두세 시간을 달리면 하룻밤을 묵기로 한 오렌지에 닿을 것이다. 사방이 노란색, 짙은 초록색, 빨간색, 보라색 등으로 또렷하게 색이 나누어진 들판이 끝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멀리 영국의 영향을 받은 조지아 스타일 옛 건물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츠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희생자들을 일본으로 모셔가지 않고 왜 카우라에다 묘지를 조성한 거지?”
“호주 정부가 희생자들 유골을 내놓지 않겠다고 해서야.” 아오가 말했다.
“1,080명이란 포로가 한꺼번에 탈출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이츠키가 말했다.
“포커나 칼 같은 것을 미리 갈아 놓고, 작업용 삽이나 곡괭이로 대항 무기를 만들어서 사전 준비를 해 두었지. 다케오 마쯔모도라는 한국인이 호주군에 밀고하는 일만 없었다면 무사히 전원 탈출할 수 있었겠지.” 아오가 대답했다. 그는 일본군 포로들과 함께 탈출했던 이 인대란 한국인에 대해선 끝까지 침묵했다.
나는 아오와 이츠키가 나누는 대화를 계속 듣고만 있었다. 내가 뭔가 진실을 말하려고 나서는 순간 진실이 낡아서 부스러질 것 같았다. 이츠키가 휴대전화를 켜서 정보를 읽으며 말했다.
“식당 문에 목을 매단 신체 박약아들과 호주군에게 사살된 인원이 전부 230명, 그리고 부상 107명 그럼 나머지는 모두 생포 된 건가?”
나는 지난밤 꿈을 떠올렸다. 전날 밤에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이 든 후에도 꿈 때문에 괴로움과 당혹감에 시달렸다. 아오와 내가 동거를 시작한 낯익은 내 방이 무엇 때문에 처음 보는 방처럼 생소했는지. 내 왼쪽에 아오가 오른쪽엔 이츠키가 조롱 섞인 표정을 하고 누워있었다. 나는 둘 사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위기를 느끼고 벌떡 일어섰다. 붉은 치마가 북 찢어졌다. 그 소리에 놀란 이츠키와 아오가 동시에 일어났다. 두 사람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광기로 번득이는 둘의 눈빛은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고, 그들을 지켜보는 내 눈빛도 광기로 번득였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도무지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꿈을 생각하자 기분이 야릇했다. 나는 기분을 전환하려고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포로들이 모포를 철조망에 걸치고 탈출하다 아군이 사살되면 그 시체를 뛰어넘고 적병을 향해 덤벼들며 끝까지 탈출했지. 탈출에 성공한 많은 포로들이 광활한 호주의 오지로 숨어들었지만 대부분 생존을 못하고 죽었어. 유골이라도 발견된 일부와 아직도 뼈도 못 찾은 포로들이 수두룩하지.”
“환경도 좋았다는데….” 이츠키가 말했다. 내가 이츠키의 말을 가로챘다.
“포로들은 탈출하다 죽기를 각오했고 죽어서라도 천황에 영광을 돌리려고 했던 거였다고 해. 그렇게 해서 국제 사회여론을 교란해서 연합군을 국제사회로부터 난처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고.”
길가에 기념비가 보였다.
“아, 벤조 피터슨.”
“벤조 피터슨이 누구지? ”
“호주 시인.”
“벤조! 벤조!”
아오가 먼저 웃었다. 이츠키가 따라 웃었다. 둘이 킥킥 웃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옛 일본말로 계속 떠들었다. 아오가 길가에 차를 세웠다. 뒷자리에서 커피를 마셔대던 이츠키는 급기야 차에서 내리며 사타구니를 움켜쥐었다. 마치 발목에 수갑이라도 찬 것처럼 뒤뚱거리는 이츠키를 아오가 곧 앞질렀다. 나도 소변이 마려웠지만 얼마 남지 않은 숙소까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5
투악 벨리 오두막 숙소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몇 번 길을 잃었고, 점심을 먹었으며, 총기 전시장을 방문한 일을 제외하면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철책 앞에 몰려온 검은 소들이 차에서 내리는 우리를 보고 큰 눈을 씀벅거리고, 약해진 햇살은 붉은 벽돌담과 현관 유리문을 비스듬히 스친 뒤 소들의 등에 부딪혀 떨어졌다. 방이 두 개 딸린 오두막은 오렌지에서 가장 높은 투악 산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오가 쪼그리고 앉아서 담뱃불을 빨아들이며 소들을 쳐다볼 동안 이츠키와 내가 트렁크의 짐을 밖으로 꺼냈다.
이츠키가 두꺼운 출입 유리문을 밀었다. 부서질 것 같은 마찰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나는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화장실에서 급히 나오다 벽을 응시하고 서 있는 이츠키와 부딪칠 뻔했다. 이츠키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식탁 위 벽에 걸린 배내옷 크기의 액자에는 그림이 아닌 흑백 사진이 들어있었다. 눈을 닦고 보았을 때야 홀로코스트 아기들 신발들이란 걸 알았다. 수천의 아기 신발이 쌓여서 이루어진 무덤, 한 번도 흙을 밟아보지 못했을 조그만 신발들, 이츠키와 나는 이란성 쌍둥이 고아처럼 넋을 잃고 서서 하염없이 그 무덤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나는 아오와 함께 사용할 방으로 들어가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이츠키도 자신의 방으로 가방을 옮겼다. 샤워를 마친 나는 밖으로 나가 광고지에 치즈를 붙여서 의자를 딛고 식탁에 올라갔다. 종이를 꾹꾹 눌러서 아기 신발 무덤을 가렸다.
저녁을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나는 와인의 마개부터 땄다. 오두막 주인이 환영한다는 뜻으로 식탁 위에 올려 둔 ‘오렌지’ 레이블 와인이었다. 하지만 와인은 텁텁해서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운전을 하느라 고생한 아오가 쉴 동안 이츠키와 내가 요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이츠키가 방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샤워도 하지 않고 잠든 것은 아닌지, 노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며 이츠키의 방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 혼자 요리를 시작했다. 오이피클, 할라페뇨, 양배추피클, 양파피클을 다져서 크림치즈와 골고루 섞어 유리그릇째 냉장고에 보관했다. 안주였다. 냉장고에서 훈제 연어, 스트리키 베이컨, 삶은 새우, 양상추, 치커리 같은 식재를 벤치 탑 위에 늘어놓고 채소부터 씻기 시작했다.
뒤늦게 방에서 나온 이츠키가 샐러드에 들어갈 삶은 새우 껍질을 벗기는 것을 보고 말을 걸었지만, 귀먹은 흉내를 냈다.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이츠키의 두 손을 잡고 발돋움해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츠키의 눈에 지난밤 꿈속에서 보았던 광기가 남아 있는 것 같기도,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 몸에서는 식초 냄새가 났다. 나는 빠르게 손을 놀려 훈제 연어 양상추 샌드위치와 베이컨 채소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삼각형으로 썰어 가지런히 담은 두 접시를 식탁 위에 올렸다.
저녁을 먹고 나자 아오가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아오가 디저트와 술상을 차릴 동안 나는 소파로 옮겨 앉아 하품하며 한 팔을 세우고 다른 손으로 팔꿈치를 방아쇠처럼 당겼다. 그러자 오는 길에 구매한 총기 핸드북이 생각났다. 방으로 뛰어 들어가 핸드북을 들고 나왔다. 점심을 먹다 옆 테이블 손님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찾아갔던 소도시 전시장에서 우리는 시대별로 전시된 셀 수 없이 많은 전리품을 볼 수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발달해 온 총기들이 삼 층 건물 전체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한때 적군의 심장에 방아쇠를 당겼을… 피용, 피용 총알이 날아가 누군가의 숨을 끊어놓는 상상을 뒤로 하고 나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을 때 소설 자료가 될 것 같은 노란 핸드북들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일본 남부 기지로’ ‘스미스 웨쏜 리볼브’ ‘윈체스트 모델 61’ 세 권을 집어 들었다.
핸드북을 만지작대며 총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아오가 칼날이 무디다고 불퉁거렸다. 손에 힘을 주면 수박이 잘릴 텐데, 칼을 원망하는 아오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일본 남부 핸드북을 손에 들고 말했다.
“일본 하면 총보다 칼의 이미지가 즉각 떠올라. 안 그래 이츠키?”
이츠키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들던 이츠키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아오는 이마에 주름을 잡고 탁탁 소리를 내며 수박을 자를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오를 보는데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던 말을 계속 했다.
“적지 않은 전쟁 역사를 읽었지만, 일본인 하면 군도로 기억되네. 그 군도로 무수한 목을 잘랐다는 기록도.”
비웃는 표정으로 이츠키가 내 쪽을 힐끗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칼이나 총이나 죽임의 도구인 것은 매일반인데….”
내가 이츠키 말을 가로챘다.
“사해동포주의는 숭고한 이상이었겠지만 일본이 아시아를 정벌하려고 했던 야망은 영토를 넓히거나 천황의 개인적인 영광을 드높이는 선택이기 전에 하나의 광기였을 뿐이야. 나는 일본이 왜 전쟁을 시작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
아오는 계속 수박을 자르고 있었다. 한번 뒤틀린 내 마음이 좀체 가라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식탁 위 신발 무덤을 가려놓은 종이가 반쯤 흘러내려 있었다. 종이를 붙여야겠다고 일어서는데 아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본은 유럽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아시아 곳곳을 해방하고 아시아를 통일해 아시아의 지도자가 돼서 자유를 찾아주자는 것이었어. 동남아 국가들이 그러한 일본의 이상을 저버리고 분뇨가 들어간 쌀을 일본군에게 보급했고. 일본이 전쟁에 진 것은 동남아 국가들이 스스로 기회를 잃어버린 바보 같은 결과였어.”
신발 무덤의 종이가 아래로 추락했다. 나는 이츠키를 힐끗 쳐다보았다. 떨어져 내린 종이를 응시하며 말했다.
“일본의 정신? 일본 정신의 정확한 의미가 뭔데? 그 당시 미얀마는 지옥이었는데. 꽃 같은 아시안 청춘들이 전쟁과 포로들의 감옥을 만들다 한번 피어나지도 못한 채 황천길을 떠났다는데.”
아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는 동안 내 피부에서 가벼운 경련이 일어나며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계속되었고 소름이 온몸을 기어 다니는 걸 느꼈다. 일본과 일본의 전쟁에 대해서 자기주장을 펼칠 때면 아오의 이마에 실지렁이 같은 핏줄이 파랗게 기어 다녔다. 내 피가 레드와인처럼 붉게, 아니 일본 군도가 내려친 머리에서 흘러넘쳤다던 피처럼 뜨거워지면서 뭔가가 내 위에 올라타고 행군을 명령했다. 나를 전사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뭔가가 나에게 명령 하며 너는 해야 해, 어쨌든 뭔가가 내 위에 올라타고 술술 행군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 수집한 내 머릿속 정보들이 내 위에서 펄럭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진실을 말 안하기로 한 소설가의 의지를 망각했다. 내가 진실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그다지 문제 되지 않았다. 내 마음이 문제였다.
“일본 천황은 무사도를 내세워 너의 할아버지 같은 살인자들을 양성하고. 어디 수백만 유대인을 히틀러 혼자 죽였을까. 스탈린 혼자 수백만 생명을, 탈아아트 혼자 수백만 아르메니아 사람을 전멸시켰을까. 광기에 도취된 유치한 그들이 만들어낸 공포의 역사….” 내가 말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거지.” 이츠키가 편을 들고 나섰다.
그때 아오가 칼을 내던지며 감색 캡을 쓰고 일어섰다. 부엌 바닥은 수박이 깨져 전쟁터에 고인 피처럼 붉었다. 아오가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부서지라고 유리 미닫이를 열고 나갔다. 아오를 따라 뛰어나갔지만 이미 차는 오두막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의 후진등이 비틀대며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츠키가 바닥에 흩어진 수박을 닦아내고 있었다.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문득 내가 열중해서 읽고 있던 책 중에서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을 기억해 냈다. 광기의 경험, 거대한 분리선 광기가 설명될 수 없는 어두운 미지 세계의 영역이라면, 다른 한 편에서는 광기는 설명될 수 없는 오류의 한 조건이다.
나는 이츠키의 눈을 쳐다보며 꼬이는 혀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츠키! 내가… 아닌 말을 한 거야?”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전등을 모두 껐다. 여전히 방안은 환하게 밝았다. 달빛이었다. 이츠키의 두 손을 꽉 붙잡았다. 방안으로 뻗어 들어온 달의 후광이 구석구석에 검은 그림자를 풀어놓고 있었다.
“뉴기니에서 싸웠던 용사는 언제나 열띤 어조로 말을 시작했어. 그가 너무 긴장해서 말의 절반은 잇새로 새버리곤 했지만.” 내가 말했다.
그가 전 남자의 할아버지란 말은 하지 않았다. 아오와 장례식 콘서트에 갔다는 말은 했다. 손을 빼낸 이츠키가 두 사람의 잔에 와인을 더 따랐다. 달빛을 받은 유리잔 속 와인이 검게 소용돌이쳤다. 와인이 바닥나자, 이츠키가 일어나 새 와인을 들고 왔다. 나는 다시 이츠키의 두 손을 잡고 흔들었다. 소설을 쓰려고 머릿속에 심어놓았던 정보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뉴기니에서 보았다고 했어. 96세의 그가 자신의 축 처진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지. 일본군이 적군의 심장을 도려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시간을 쟀다고. 째깍거리는 초침을 지켜보다 심장이 멎으면 종이에 심장이 견디어낸 시간을 기록했다고. 도려낸 심장은 저마다 견디는 시간이 들쭉날쭉했다고. 마지막엔 일본군들이 그 죽은 포로들의 살을 먹었다고.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그땐 아군끼리 서로 칼로 베어 그 살도 먹었다고. 그때 일본군은 굶주림 탓에 모두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고. 피터는 이야기하다 자주 하늘을 보았어. 눈물은 아래로 떨어졌어.”
한 번 구르기 시작한 말의 바퀴가 멈추어지지 않았다.
“너무나 잔혹하게 그리고 너무도 많은 머리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뒤로하고 수렁 속으로 굴러갔다고. 피터는 또 하늘을 보았어. 눈물이 아래로 주룩주룩 떨어졌지.”
시큰둥하게 듣고 있던 이츠키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뉴기니 원주민이 원래 식인종이었잖아.”
이츠키는 내 말을 들은 것 같지 않았다. 눈빛이 먼 곳에 가 있었다. 그동안 내 피만 뜨거워져 있고 혼자 떠들고 있었던 셈이었다.
“내 말은, 일본군이 식인 했다고.”
느닷없이 그동안 보고 듣고 읽은 전쟁 기록에 환멸이 찾아왔다. 지금까지 쓴 2권의 전쟁 소설과 앞으로 쓰려고 수집한 자료들에 의구심이 일었다. 책들이 옆에 있다면 땅속에 묻거나 불태워버리고 싶었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왜곡한 수많은 역사에 자칫 한 줄을 더 보태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생각 끝에 역사란 한갓 아름다운 농담일 것 같았다.
이츠키의 텅 빈 눈은 먼 피안에서 돌아올 줄 모르고 있었다. 이츠키에게 들었다. 아오의 친모가 아기를 갖지 못해 이츠키를 입양한 후 삼 일 뒤 그녀의 입덧이 시작되었다고. 8개월 뒤 아오가 태어났다고. 섬세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오의 친모이자 이츠키의 양모는 언제나 기모노만 입었고, 양부는 군인이었다고.
이츠키가 일어나 비틀비틀 아기 신발 무덤 앞으로 걸어갔다. 달빛을 받은 사진에 작은 빛의 입자가 가냘프게 어룽졌다.
“잃어버린 내 아이. 나는 언제나 내 아이를 생각해. 내 아이 말이야. 아내를 부검했을 당시 아기는 팔 센티미터 크기였어. 내가 만져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아이, 아이에게는 얼굴도 이름도 없었어. 아들이었는지 딸이었는지도. 스스로 생명을 지키며 세상을 갈망했을 내 아이! 그래서 견딜 수가 없어.”
이츠키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단숨에 와인을 들이켠 뒤 이츠키를 껴안았다. 그의 들썩이는 어깨에서 죽고 싶다는 충동이 내게까지 전해졌다. 누가 먼저 상대방을 유혹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잠시 뒤 우리는 이츠키의 방에 있었고 커튼 사이로 침입한 달빛이 이츠키와 내 그림자를 침대 위에 한데 묶어 놓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일어나 속옷, 블라우스, 스커트를 차례로 입으며 어떤 기억의 힘에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 혼자 아기를 낳을 수도 있었다. 나는 남자와 헤어지기로 결심한 다음 날 아기를 지웠고, 내 삶은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나를 버린 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아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면 견디기 힘들었다. 분명한 것은 상상하지 못한다고 해도 내 안에 아기가 존재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생명이 내 안에서 빠져나가던 순간의 기억, 내 안에 아기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지울 수 없다. 사라진 아기에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신발을 신겨주고 싶어졌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한 번 그리고 둔중하게 두 번. 나는 문을 반쯤만 열었다. 밖에 아오가 캡을 벗어들고 서 있었다. 아오의 발소리도 출입문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6
돌아보면 광기란 그다지 행복한 행태는 아니었다. 광기가 휩쓸고 지나간 뒤의 남은 우리의 밤은 느렸다. 그 느림은 고통스러웠고 창가에 놓인 시곗바늘의 굼뜬 움직임이 우리에게 실타래를 풀라고 졸랐다. 하지만 누구도 선 듯 그 기회에 손을 뻗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종종 아무 이유 없이도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왜 자신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야 하는지. 그래서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 결과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아프고 괴로워하면서.
그 새벽은 어느 날보다 굼뜨게 찾아왔다. 작별 인사도 없이 이츠키가 떠났고, 아오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커튼이 열려 있는 유리문 너머 멀리 투악산 봉우리를 응시하고 서 있었다. 아오는 담담했다. 그리고 잠시 뒤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그만 소리로 불렀다.
“아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해명을 미룰 수 없었다. 나는 이츠키와 잤고 이제 그 해명을 해야 할 차례였다. 거짓말은 들통 나게 마련이다. 누가 먼저 상대방을 유혹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곧 해명을 단념했다. 이츠키와 내가 잤다는 사실을 되돌릴 수 없는 한, 해명하기 위해서 바보가 되거나 사기꾼이 되고 싶진 않았다. 해명해 보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나는 뼈를 깎는 고통을 겪었고, 무엇을 어떻게 해명한단 말인가. 핑계와 거짓말을 하는 대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 앞에는 오로지 어떤 해결책을 찾아 새롭게 가야 할 각자의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머나먼 종점을 향해서 고통과 환멸을 안고서라도 문득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7
나는 쓰기를 멈추고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깊은 밤만이 내 곁에 남았다.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할 밤, 회한만이 가득한 밤, 혼란이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 지친 기분이 든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지금까지 쓴 글에 ‘모두 선택’을 한다. ‘Delete’를 누른다.
지난 일들을 이해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기억을 샅샅이 살펴보려던 내 마음이 왜 처음과 달라진 것인지? 이야기됨으로써 사건들과 낱낱의 내용, 하찮은 사실들이 사건 당시에는 갖지 않았던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을까? 글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과거는 기억의 제물이 되어 오래도록 나와 함께 할 것이다. 결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어둠, 더없이 깊은 밤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한때 고통스러웠으나 이제 하나의 무덤처럼 허망한 기억, 마지막으로 남은 밤이 버티고 있다. 어렴풋한 빛은 형체와 색깔을 되살리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