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의 충절 따라 걷는 가을길…황금빛 은행터널 아래 여유 만끽
가을의 정취가 깊어가는 계절, 짧아서 더 아쉬운 이 시기에 단풍과 함께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을 기리는 영천 임고서원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된 이곳은, 영천 시민들이 ‘가을 명소’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포은의 정신이 깃든 서원.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 8년(1553) 부래산에 처음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선조 36년(1603) 현재의 위치에 중건되어 사액을 받은 유서 깊은 서원이다.서원 경내에는 포은유물관을 비롯해 조옹대, 선죽교, 충효문화수련원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인근에는 정몽주 선생의 생가도 남아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1337년 영천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나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이름을 남겼다.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문하시중에 오르기까지 학문과 정치, 외교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단심가’로 대표되는 그의 굳은 충절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서원을 찾았다면 먼저 포은유물관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유물관에는 선생의 생애와 충효 정신, 그리고 임고서원의 역사와 문화가 다채로운 전시물과 영상 자료로 소개돼 있어, 아이들과 함께 의미 있는 역사 체험을 즐길 수 있다.
△황금빛으로 물든 서원 풍경.
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송탑비’가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이한다.조금 더 들어가면 포은이 낚시를 즐겼다는 ‘용연’이 고요히 자리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포은이 낚은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용이었다 하여, 그 연못을 ‘용연’이라 불렀다고 한다. 잔잔한 수면 위로 붉은 단풍이 비치고, 중앙의 분수가 은은한 물결을 일으키며 고즈넉한 운치를 더한다.
조옹대에 오르면 서원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밴 한옥과 단풍이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 같다.서원 앞에는 태종 이방원에게 피살된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개성의 선죽교를 실제 크기로 재현한 임고 선죽교가 있다. 한석봉의 글씨로 전해지는 비석 또한 그대로 탁본하여 세워, 역사적 의미를 더했다.
선죽교 앞에는 수령 500년을 자랑하는 대왕 은행나무가 서 있다. 높이 약 30m, 둘레 6m에 달하는 이 은행나무는 가을이면 황금빛 잎으로 서원 일대를 환히 물들인다. 이곳은 임고서원의 대표적인 포토존으로, 매년 가을이면 수많은 관광객이 몰린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며 선죽교 위를 덮는 장면은 마치 오래된 사극의 한 장면처럼 장엄하다.
△솔향 가득한 숲길, 포은 단심로.
임고서원 주변에는 포은의 충절을 기리는 ‘포은 단심로’ 둘레길이 조성돼 있다.임고서원에서 도일지, 일성부원군묘소로 이어지는 1코스(2.2km), 전망대와 철탑을 거쳐 돌아오는 2코스(5km), 조옹대와 능선을 따라 걷는 3코스(7.5km) 등으로 구성돼 있어, 체력과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해발 200m 남짓한 완만한 능선길은 소나무 숲이 울창해 사계절 내내 걷기 좋다. 가을이면 낙엽이 푹신하게 깔려 무릎에 부담 없이 걸을 수 있고, 중간중간 만나는 정자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시골 마을의 풍경은 한결 따뜻하다. 솔향기와 흙내음이 어우러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포은의 굳은 마음과 절개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100년의 세월을 간직한 임고초등학교.
서원을 나와 조금 걸으면, 1924년 개교해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임고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이 학교는 2003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을 만큼 아름다운 숲으로 유명하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늘어선 수령 100년의 플라타너스 7그루는 학교의 역사를 함께해왔다. 성인 네 명이 팔을 벌려야 감쌀 수 있을 만큼 굵고, 하늘로 솟은 나무는 사진 한 장에 다 담기 어려울 정도다.
가을 주말이면 운동장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그네와 미끄럼틀을 오가는 아이들,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들의 모습이 평화롭고 따뜻하다.
△커피 향 따라 머무는 가을.
최근 임고서원 주변에는 소박하지만 감성 가득한 카페들이 하나둘 들어서며 ‘임고 카페거리’가 형성돼 있다. 한적하고 아늑한 시골 마을에서 역사 탐방을 즐기고, 단풍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리기에 더할 나위 없다.
깊어가는 가을, 황금빛 은행나무와 웅장한 플라타너스, 그리고 포은 선생의 충절이 깃든 임고서원에서 올가을의 추억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