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청송객주문학대전
등에 와 닿는 햇살의 무게가 한결 가볍다. 계절을 먼저 알아차리는 건 의식이 아닌, 감각이다. 입술 언저리에 닿는 바람결이 까슬하다.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옆구리에 터를 잡을 때면, 나는 돌확과 처마가 잇닿은 풍경 속에 조용히 선다.
물방울 하나가 돌확 표면을 툭 치는 첫소리가 들린다.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움푹 파인 제자리를 기억하는 것일까. 물방울은 나직나직 돌을 토닥인다. 바닥에 깔리는 젖은 음은 금세 사그라지지만, 곧 길고 얇은 여운으로 가슴을 미세하게 두드린다.
또 한 방울, 다시 한 방울. 이번엔 돌확 가장자리에 파장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단단한 돌의 입자를 두드리듯 강하게 훑고 지난다. 한 번, 두 번, 이윽고 세 번째 물방울이 수직으로 난 길을 가벼이 뛰어내린다. 한 줌 고인 물이 흔들린다. 잔잔하게 퍼져나가는 동심원, 하지만 물결이 늘 완벽한 형태를 이루는 건 아니다. 돌확 바닥의 미묘한 경사 때문인지, 동심원의 끝은 낮은 곳으로 기운다. 물은 늘 그렇듯 아래로 흐를 때 온유하다.
자세를 낮추고 세상과 화합하는 물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삶에서 흔히 말하는 무엇무엇의 가치란 것도 낮고 조용한 자리에서 싹을 틔우는 게 아닐까 하고. 돌확은 묵묵히 그걸 보여주기 위해 인내한다. 시간이 겹겹이 쌓여 층을 이룬 숫돌처럼, 어느새 단단한 한 겹의 껍질이 되어간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결마저 차곡차곡 거느리며 조용히, 그리고 성실하게.
세상의 질서는 누가 잡아주지 않는다. 기꺼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자 하는 만물이 모여 바탕이 된다. 돌확의 묵직한 침묵이 그걸 증명한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결이 서사를 감싸고, 마침내 한 겹 더 단단해진 껍질이 세상과 당당히 맞선다.
돌확은 정(靜)하면서도 동(動)하다. 켜켜이 내려앉은 낡은 흙 때가 묵직하게 얹혀도 말없이 시간을 아우른다. 안으로 침잠하는 것들의 표본이다. 그러다가도 주변의 변화에 빠르게 반응한다. 빗소리와 화합해 음을 만들고, 바람을 다스리는 요령을 익힌다. 빨아들인 햇볕을 온기로 만들어 다른 이를 보듬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감싸고 품어주는데 익숙한 돌을 바라보면, 세상 풍파를 견디며 주름진 이마로 우리를 감싸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고단함을 품었기에 겉은 거칠고 투박해도 무너지지 않은 뚝심이 옹골지다.
고개를 숙여 속을 들여다보면, 오래도록 물기를 품은 안쪽에서 촉촉한 기운이 흐름을 느낀다. 물기가 원형을 감싼 덕분이다. 찰랑거리는 작은 물결 위에는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처럼 준비된 고요함이 있다. 고요한 속으로 계절이 오간다. 하늘이 담기고, 낙엽이 스치고, 가닥가닥 풀어진 봄바람이 속을 채운다. 혹은 어린 내가 생각의 씨로 키운 동화가 일렁이기도 한다.
그러나 돌확은 자신을 드러내려 애쓰지 않는다. 조용히 자기 공간을 내어주면서, 아무 일 없는 듯 순결한 몸짓으로 남을 뿐이다. 속살 깊고 겹겹이 쌓인 껍질 사이, 진짜 삶의 맛은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돌확, 그 끝 모를 깊이에 자신을 모두 내주는 그릇의 겸손함이 오래도록 마음 한구석에 남는다.
돌확은 홀로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가장자리엔 또 다른 생명이 자란다. 물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 돌과 흙 사이 경계, 비늘처럼 고요하게 달라붙은 녹색의 생명이다. 그 위에선 비누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나온다. 나는 이끼에서 어머니의 손길을 떠올린다. 수없이 다녀간 손끝은 벨벳처럼 미끄러져, 물기 어린 촉감으로 전해진다. 돌 표면에 닿은 손길의 흔적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파동은 생생하게 기억을 흔든다.
새벽녘 처음 물을 긷던 소리, 쌀을 씻던 손끝의 부딪힘, 푸른 채소의 생생한 스침, 붉은 김칫소가 버무려지던 찰진 박자, 손끝이 남긴 흔적 안에 우리 삶의 기록이 하나씩 새겨진다. 당시의 냄새와 소리는 일정한 순서가 있었다. 돌확은 때로 버팀목처럼 단단했다. 어머니의 삶은 돌확 곁에서 반복된, 무심한 듯 아름다운 한 편의 시였다. 비누 거품이 겹겹이 쌓이듯, 헌신 또한 차분하게 스며들었다.
겨울이 시작될 즈음이면 돌확은 가장 먼저 소금을 품었다. 차가운 소금물 속에 배추는 납작 엎드려 기세와 숨을 낮췄다. 마당의 절구 소리는 한 계절을 의미했고, 잘 익은 고추는 제 역할을 다했다. 어머니의 등은 새벽 공기 속에서 어느새 따스하게 달궈졌다. 무끈한 배추가 어깨에서 등허리로 천천히 흘러내릴 때마다, 뼈마디에서는 퉁, 하루의 삶이 꺾였다가 다시 세워졌다.
손목에 불끈 솟아오른 힘줄이 더욱 도드라질수록 생은 시를 닮아갔다. 짠 냄새와 붉은 국물은 돌확의 가장 낮은 곳에 서서히 고였다. 김치의 맛은 오랜 준비와 강직한 버팀으로 완성되는 법이다. 어머니는 돌확을 앞에 두고, 삶의 깊은 의미를 묵묵히 증명했다. 배추의 짙푸른 겉잎은 소금물 속에서 투명해지며 자신을 비우고, 새로운 맛을 받아들였다. 마치 어머니의 사랑도 그렇게 차곡차곡 절여져 우리에게 깊은 맛으로 스며들던 것처럼.
새벽 첫물이 돌확을 깨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기억의 파편이 아니다. 소리와 냄새로 채워진 시간이다. 바가지의 잔잔한 여음, 물과 돌의 마찰음, 곁을 돌던 다정한 발걸음 소리, 모든 소리가 생의 길을 안내했고 그 길은 올곧음과 통했다. 몸이 먼저 기억한다는 것, 감각이 이성을 앞서는 순간은 자주 찾아온다.
뜨겁게 달아오른 어머니의 손바닥도 돌확의 차가운 표면을 먼저 찾았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교차하는 시간 속으로 평온이 찾아들었다.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던 손이 식으면 계절은 한순간 잊혔다. 그렇게 돌확과 어머니는 서로를 의지하며 오랜 날들을 보냈다. 안쪽 벽 닳은 흔적이 그걸 말한다. 찰나처럼 스친 순간들이 모든 의미의 근원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삶의 진실은 말이 아니라 온기로 전해지는 법, 맨살을 드러내야만 진정성을 얻는 것과 같다.
밤이 깊으면 하늘도 마당으로 내려와 잠을 청하던 날들이 있었다. 별들도 슬그머니 한쪽 하늘을 비우고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그런 날들이 쌓여 서사는 조금씩 완성되어갔다. 과거의 어느 한 점에서 시작된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현상은 사라졌지만, 재생은 끝없이 반복되었다. 모든 기억이 선을 이루어 한 점으로 모인 돌확을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한다.
의미는 요소요소가 결합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진리다. 돌확이 말을 건네온 것도 내가 진리를 갈구했기 때문이다. 날것의 깨달음, 머리로 익히지 않고 몸으로 받아들인 새로운 해석이다. ‘낮아짐’이라는 건 한 번 더 일어서보겠다는 의지다. 인생의 지도가 새겨지는 곳도 낮고 조용한 구석이다.
장맛비 쏟아지는 밤, 돌확은 여전히 우뚝하다. 어둠과 빗물이 만나는 자리로 하지 못한 말이 쏟아진다. 돌확의 내부가 잠깐 요동치다 고요해진다. 그 속에 내 삶의 이력이 오롯하다.
